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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배서더 서울 풀만에서 본 풍경과 그 정의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객실 내 창가, 우자이 사진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객실 내 창가, 우자이 사진

   어느 여름날에 충무로 근처 엠베서더 풀만 호텔에 갔다. 아침 창가에 앉아 차도 내려마시고 명상도 하다가 밖을 내다봤다.

   남산과 동국대학교와 아파트 단지, 빌라 골목이 한눈에 보였다. 남산을 원경으로 호텔 뒤편 키 큰 나무에 시선이 오갔다. 나무가 다음 나무로 연결되어 남산까지 이어졌다. 아파트 단지에 조성된 나무는 길가 나무로, 길가 나무는 동국대학교에 조성된 나무들로, 그리고 그 나무들이 남산 자락으로 향하는 식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세상은 결국 이래저래 모두 연결된 거라 말하는 듯했다.

   또 아파트 창문과 단독 주택 지붕, 빌라 골목을 번갈아 봤다. 남산을 경치로 하는 아파트에서 맞을 아침을 상상했다. 단독주택 정원에선 강아지하고 어린애가 뛰노는 걸 그려봤다. 빌라가 주욱 들어선 골목에선 대학생들의 밤이 생각났다. 건축을 배우려 대학교를 다닐 땐 유난히 밤을 많이 새웠다. 

   내 삶의 기억과 단면이 장면 곳곳과 연결되었다. 온갖 기억과 삶과 상상이 뒤얽혀 이야기가 되려 하고 있었다.

풍경의 여러 정의

   호텔에서 봤던 장면과 그 기억을 자분자분 늘어놓아 봤더니, 그게 풍경이구나 싶었다. 궁금했다. 풍경이란 무엇이고,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사전에는 세 가지 뜻이 있었다. 1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 2 어떤 정경이나 상황, 3 미술 자연의 경치를 그린 그림. 그저 자연이나 지역을 풍경이라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관, 경치, 광경, 장면 그런 대체할 단어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림이 아니어도 시선에 닿는 건 풍경이 될 수 있었다. 나에게 풍경이란 어떤 상황. 그 의미에 좀 가까웠다. 저녁 짓는 마을 풍경, 밤 기차 속 풍경처럼. 이런 의미로 풍경이란 단어를 입에 오르내렸던 듯싶었다.

   조경학 교수 강영조의 책 『풍경에 다가서기』에선 풍경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경관공학자 나카무라 요시오의 정의에서 빌려왔다고 했다.

   “대지의 시각상과 인간 정신이 만나는 곳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세계상. 그것은 공간의 객관적인 성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시각상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 중간에서 발생하여 인식과 평가가 혼연일체가 되어, 현전 하는 공간의 시각상이 핵심이 되어 성립하는 이미지 현상이다.”
   풍경이란 대지의 투시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미지 현상이다. 풍경이라는 현상에는 대지라는 물리적 실체와 그것을 시각상으로 포착하는 사람, 이 양자의 존재가 필수다.

 

   김훈은 그의 책 『풍경과 상처』 말머리에 풍경과 상처의 관계에 대해 썼다.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차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또 지난 글 '뮤지엄 산 - 건축 배치와 입면을 통한 명상의 순간'을 쓰며 관람했던 기획전시 『풍경에서 명상으로』 에는 이런 문장을 관람 동선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자연을 풍경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순간, 풍경 속에 놓인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애워싸고 있는 풍경이 지금껏 우리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작은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 자연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뮤지엄 산 - 건축 배치와 입면을 통한 명상의 순간

기획전시 『풍경에서 명상으로』를 돌아보기 19년 2월 뮤지엄 산에 방문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일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명상이 주는 평안에 목말라 있었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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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정리해 보면 풍경이란

   풍경에 대한 설명을 모아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장면과 이를 방해하지 않는 나 가까이의 공간 사이에서 풍경이 드러난다. 덧붙여 ‘방해하지 않는 나 가까이의 공간’이란 물리적으로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도 그래야 한다.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에선 그 정서적 상태를 사색, 깊은 심심함이라 말하며 풍경과 연결 짓는다. 메를로-퐁티와 세잔을 언급하는 대목이다.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풍경에 대한 세잔의 사색적 관찰을 외화 또는 탈내면화로 묘사한다. “우선 그는 다양한 지층을 명확하게 이해하려고 시도했고, 그다음에는 더 이상 꼼짝하지 않은 채 세잔 부인의 말처럼 눈이 머리에서 튀어나올 때까지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는 말했다.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캔버스에 유채, 1902~06

 

   즉, 사색하는 마음 상태여야, 비로소 장면은 풍경이 된다. 문득 아침에 눈 뜨자마자 쥔 휴대폰을 잠자기 전까지 붙들고 있는 내 삶을 잠시 돌아보며 사색이란 얼마나 나와 거리가 먼지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온갖 데이터와 정보에서 거리를 둔 채,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은 얼마나 개운한가! 감탄했다.

   어떤 단어를 구체적으로 정의한다는 건 그 대상이 가진 개념을 명확하게 한다는 걸 넘어 탐구의 시작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음 쓸 글을 통해 지난 인테리어 작업을 돌아보려 한다. 그 작업에서 풍경을 일상 가까이에 둘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실제로 생각한 만큼 잘 작동했고 요긴하게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풍경의 필요조건과 같은 마음 상태, 사색하는 마음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풍경이란 단어가 명확해지니, 비로소 그 실패의 이유를 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