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걸 외면하다 보니 무서워졌다
건축사 자격시험 준비로 그간 글을 올리지 못했다. 합격은 물 건너갔고, 그 대신 손목에 건초염이 찾아왔다. 잘 다독이고 다시 힘을 비축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현장 감리를 하고 토마토 패키지 디자인 수정하는 단순한 시간 속에서 죄책감 같은 게 살짝 들었다.
블로그 글은 언제 써? 이제 시간 많잖아.
쓰기로 한 생각은 많은데 글자로 옮겨 적는 일은 엄두가 안 났다. 이런 것 저런 것 써야지 하며 그려둔 그림, 찍어둔 사진, 자료 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더 어렵고 외면하고 싶었다. 회피의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글 쓰는 일에 대한 미련은 못 버리고 이런저런 말들을 모아둘 요량으로 팟캐스트를 들으며 지냈다. 글 쓰는 사람들의 말을 모아두면 언젠가 다시 글 쓰는 일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겠지. 그런 용기가 차오르겠지 했다.
그러다, 씨네21 김혜리 기자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조용한 생활 9월호』 중 정서경 작가 인터뷰 속 말들이 마음에 남았다. 이렇게 쓰는 거구나 했다. 글 쓰는 건 이렇게 습관을 들이는 거구나!
정서경 작가 인터뷰
- 김혜리 기자 : 작가님은 글 쓰는 습관은 어떤 편이세요? 꾸준히 하루 중 비슷한 때에 쓰신다 거나
- 정서경 작가 : 꾸준히 쓰는 편이에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비슷한 시간대에 자는 편인데,
저는 글을 쓴다는 게 인간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오랫동안 집중하기도 힘들고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흩뿌려놔요. 글 쓰는 일을.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인간이 좀 연약한 시간? 그때 나를 설득할 필요 없이 한 세 줄 쓰는 거죠. - 김 : 음, 몸을 책상 앞으로 데려다가!
- 정 : 네, 그냥 쓰는 거죠. 정말 바쁠 때는 그렇게 해요. 그냥 내가 쓰기 싫다 하고 생각하기 전에.
그러고 나서 밥 먹어야 되잖아요. 밥 먹고, 커피 마셔야 될 것 같잖아요.
그럼 커피 마시기 전에 다섯 줄 쓰자.
왜냐하면 제가 카페인에 민감해서 많이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 커피 마실까? 생각하거든요. - 김 : 아! 중요한 결정이군요. 그게!
- 정 : 커피를 마신 다는 게 되게 중요한 스케줄이에요.
그걸 하기 전에 한 다섯 줄 쓰자. 그렇게 앉는 거죠.
그리고 또, 걷기 전에 써요. 걷는 게 기분이 좋기 때문에 걷는 시간을 좀 기다려요.
…
그런 식으로 펼쳐 놓는 거예요. 쓰는 일들을.
들으면 아시겠지만 오래 쓰진 않아요. - 김 : 한 번에 앉아서 한몇 씬을 다섯 시간씩 쓴다거나 그런 건 없는 거군요.
- 정 : 있어요. 있는데 문제는 다섯 시간을 쓰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요.
그 준비를 육체적으로 되어있어야 하고 심정적으로도 되어있어야 되고 또 계획도 잘 세워져 있어야 되는데,
그걸 하려면 약간 암벽 등반?이라고 생각해보죠?
커다란 암벽이 있어요. 하지만 그곳은 아무도 안 간 곳이라고 해볼까요?
그렇다면 거기에는 길이 없잖아요. 그럼 길을 탐색해야 하잖아요.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한번 가 보고.
가보고 가보고 가다가 진짜 갈만한 길을 찾으면 다섯 시간 쓸 수 있어요. - 김 : 한 작품 쓸 때 자주 오는 일은 아닐 수 있겠네요?
- 정 : 자주 와야죠. 그렇지 않으면 쓸 수 없어요.
자주 오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써 보는 거예요. - 김 : 세 줄, 다섯 줄 이야기를 하셨는데 머릿속에 숫자들이 들어 있나요? 내가 가야 할 거리에 대해서?
- 정 : 음 세 줄, 다섯 줄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제가 제 자신한테 그렇게 말해요.
딱 다섯 줄만 쓰자.
그렇게 생각하고 앉지만 실제로는 더 많이 쓰는 경우가 많아요.
그냥 쉬워 보이려고 다섯 줄만 쓰자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서경 작가의 글 쓰는 습관처럼, 나도 세 줄씩, 아니 한 문장씩, 아니 더 잘게 쪼개어 세 단어씩만 다시 써 봐야겠다. 그리고 이 방법은 건축 설계, 디자인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조금씩 조금씩 마라톤 하듯 리듬감을 놓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