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암리 완숙토마토 박스 디자인
건축은 '어른의 자금'(구마 겐고는 그렇게 표현했다 - 탄파쿠나 게시글)으로 움직인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히 그렇다. 각자의 단독주택에서 사는 게 아니고 대부분 빌라나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살아서 그럴 거다. 단독주택을 짓는 돈 보다 공동주택을 짓는 돈이 훨씬 많이 드는데 여럿이 모여사는 바람에 건물을 지을 의뢰는 적다. 반면 나는, 여전히 어리고 모르는 게 많다. 어른의 자금이 흘러가는 세계에선 나를 믿고 맡겨줄 사람은 없다. 그래도 내 생각이 어떤지 세상에 계속 드러내 보이고 싶다. 또 부동산의 가치나 공공의 가치가 아닌 무엇을 보여주는 시도를 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친구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친구는 완숙 토마토를 길러 시장에 팔려고 하는데, 아직 상품명이나 박스 디자인이 없었다. 더 나아가 토마토 재배에 그치지 않고 지역 맥주 브루어리(안동맥주, 가나다라 브루어리)와 협업을 꿈꾼다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박스 디자인을 이리저리 찾아보고 배워가며 해 봤다. 미숙하지만 이리저리 해보면 조금씩 브랜딩이나 마케팅 혹은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방법을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게 건축과 만나면 공간 기획이 될 수도, 설계부터 운영까지 디자인하는 사람이 될 수 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희망으로.
'엄암리' 완숙토마토
엄암리는 엄정마을과 풍암마을의 이름을 딴 지명인데 엄나무와 정자가 있던 마을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엄암리에서 나고 자란 토마토, ‘엄암리 완숙토마토’라고 이름 짓는 건 어떨지 제안했다. 엄암리가 가진 속 뜻은 던져두고서라도 직관적이었다.
엄나무와 민화
엄나무(음나무)는 마을 보호하는 나무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의미와 함께 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마을을 보호하는 나무, 공동체의 건강을 기원하는 그 마음이 민화 풍의 토마토 그림을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민화가 복 받고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려졌다는 점이 결을 같이 하는 듯했다.
도매시장에서 토마토 박스
아마 이 토마토 박스는 소비자에게 닿지는 않고 도매시장에 상인들의 눈에 보이게 될 텐데 박스가 쌓아진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가 또 중요했다. 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린 농장의 모습이 연상되면 좋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