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펠과 대화
어느 날은 쿰펠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자이, 요즘 한국 아뜰리에는 어디가 재미있는 프로젝트 많이 해?"
"재미있는 프로젝트요? 재미.."
"질문이 이상했나? 요새 일하는 게 재미없어서. 일에 흥미가 떨어지니 정해진 시간만 딱 일하고 퇴근하면 지쳐있고, 한 건 없어 보이고. ··· 때론 몸으로 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해. 그날 일을 마치면 그걸로 끝. 내일 일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 말야."
"저도 가끔 그래요. 애써 집중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매일 일기 쓰면서 보잘것없는 하루여도 조금 나아진 게 있으면 자축하는 시간을 가져요. 그러다 보면 순간 일에 집중하는 저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맞네, 눈에 바로바로 보일만큼 성장할 리가 없는 걸 알면서도 조급해하는 것 같아. 독일 오고 나서 단기 목표를 세워두고, 이뤄내자는 마음으로 지내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 다음 목표는 뭘까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어."
"저도 조급 해지더라고요. 오늘 아침엔 공모 뭐 나온 것 없나 찾아봤어요. 할애할 시간도 없으면서. 하는 일이 건축이어서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했어요. 무언가를 짓는 사람이기도 하고, 생각을 제안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디자인하는 사람이기도 하잖아요. 무엇 하나 깊게 파고들어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셋을 다 잘해야 할 것만 같고요."
"만능은 어려울 것 같아. 나는 짓는 사람에 집중하려고. 함께 하는 거잖아. 건축은."
"맞아요. 만능은 어려워요. 그래도 계속 욕심이 나네요. 셋 다 잘하는 일."
성장, 참 어려운 단어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샘이 가득가득 해진다. 비슷한 연차인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부럽다. 대단하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독이게 되는 글을 찾기도 한다. 이번에도 또 탄파쿠나의 게시물이었다. 구마 겐고의 말이었다.
건축인이란 장거리 주자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동일한 페이스로 계속해서 달리다 보면 조금씩 신뢰를 획득할 수 있고, 그렇게 쌓아 올린 신뢰 위에 지금까지 만든 것보다 조금 더 큰 건축을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거나, 조금 더 도전적인 디자인과 디테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장거리 달리기는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달리기란 기본적으로 매우 고독합니다. 단거리 달리기의 경우, 바로 옆을 달리는 사람이 있어서 골인 지점이 보이기도 하고 고독감을 느끼기도 전에 승부가 끝나버리지만 장거리 달리기의 경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나 페이스 메이커가 홀연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게 반복되면서, 결국에는 ‘아, 나는 홀로 뛰고 있구나’를 되새기게 됩니다. 장거리 달리기에는 그만큼의 고독을 참을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하루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을 읽었다.
만약 당신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당신의 내적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장이 서서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신을 전과는 다른 인식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판단이 조용하고 안정되게 발전하도록 두십시오. 그것은 모든 진보와 마찬가지로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해서도 강제당하거나 촉진되는 것이 아닙니다. 달이 찰 때까지 잉태하였다가 낳는 것,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든 인상, 모든 감정의 싹을 완전히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어두운 곳에서 말할 수 없는 곳에서,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오성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완성하여 깊은 겸손과 인내로 새로운 분만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이것만이 예술가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해에서도,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서는 시간으로 재는 법이 없습니다. 해(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10년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술가란 계산하거나 세는 것이 아니고, 수목처럼 성숙하는 것입니다. 수목은 그 수액의 흐름을 재촉하지 않고 봄날의 폭풍우 속에 유유히 서서 혹시 여름이 안 오는가 하고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여름은 꼭 옵니다. 그러나 여름은 마치 눈앞에 영원이 있는 듯 아무 근심도 없이 조용히 드넓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인내심 강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옵니다. 저는 그것을 날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괴로워하면서도 배우고, 그 괴로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내야 말로 전부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손흥민도 기본을 위해 7년이 걸렸다는데
손흥민 선수도 기본기를 배우는 데 7년이 걸렸다. 그의 아버지가 경향신문에서 한 말이었는데, 건축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축구를 배운다는 건 기본기를 배우는 오랜 여정의 시작일 뿐이라고. 그리고 또 건축은, 쿰펠의 말처럼 함께하는 거다. 기본기와 협력. 이 둘을 잘 새기다 보면 오래오래 건축을 하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구마 겐고의 장거리 달리기 비유처럼,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 '수목이 수액의 흐름을 재촉하지 않고 성숙해 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