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과잉인 시대의 고요한 공간
소통의 과잉인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전화,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이메일, 유튜브에서는 무수히 많은 알림을 보내온다. 볼 필요가 있는 정보들은 그 자리에서 읽지 않고 탭으로 넘겨두거나, 스크랩해 두는데 워낙 많은 수의 글과 그림이 있어 들춰볼 엄두가 안난다.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입간판, 특이한 형태의 건물, 쇼윈도우, 잘 닦아 놓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건다.
문제는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주의력에는 한계가 있고, 모든 소통의 시도는 주의력을 소모한다. 나는 이를 피하기 위해 고요한 공간들을 찾아나섰다. 마음을 조금은 추스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 마음으로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에 갔다.
앤트러사이트 서교의 입구는 이렇게 고요해졌다.
기존 건물의 지하층을 입구로 리모델링했다.
앤트러사이트 서교는 기존 블란서 주택의 지하층을 입구로 리모델링 했다. 카페를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두 지하 공간을 오가도록 하는 계획이다.
길에서 돌무덤 정원을 지나 입구를 만난다. 정원을 지날때면 입구층과 그 윗층 사이에 시선이 놓인다. 그 덕에 각 층 카페 공간이 속 깊숙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다채롭다. 카페 사람들은 정원을 지나 카페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구경하듯 열린 방향으로 앉아있다.
입구 안에 들어서면 어두운 내부공간이 외부의 밝은 돌과 대비를 이룬다.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눈이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입구는 그만큼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이런 시퀀스를 통해 입구 지하공간은 거름망 역할을 한다. 고요한 공간을 만들어낸다.정확히는 길과 정원과 입구가 가진 레벨차를 통해 빛과 외부 풍경과 공기와 소리가 걸러진다. 돌무덤 정원과 입구의 단차는 입구 공간은 더욱 어둡게 만들어준다.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게 하고, 돌에 비친 반사광만 부드럽게 내부를 밝힌다. 또 길과 입구 사이에 솓아오른 돌무덤은 시선의 깊은 가림막이 된다. 길과 주변의 건물이 바로 풍경이 되는 것을 막는다. 정원을 감싸고 도는 교목들과 독특한 형태의 소나무는 이를 돕는다. 지하는 공기 또한 거른다. 지면에 접한 외벽과 바닥은 땅 속의 온도를 그대로 전달한다. 서늘하다. 그리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지하에 반쯤 파묻힌 입구는 외부 소리를 거른다. 지하의 열린 면은 돌무덤 정원에 접해있다. 소리는 돌무덤을 넘어와야 하는데 쉽지 않다.
공통된 재질과 색감으로 디자인했다.
바닥과 계단, 문, 가구와 소품 모두 합판에 스테인을 먹여 만들어졌다. 같은 재질로 만들어 하나의 오브제로 인식되지 않고, 하나의 공간를 인식하도록 한다. 카페는 테이블이나 소품이나 선반을 주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위에 담긴 커피 그리고 창 밖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바라보도록 한다. 그렇게 우리는 빛과 창으로 들어오는 걸러진 외부를 본다. 내부 공간이 가진 공기의 촉감과 소리가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고요한 공간은 오감 정보를 단순화하는데서 온다.
앤트러사이트 서교의 입구는 건축 계획에서부터 인테리어, 가구, 소품까지 고요한 공간임을 드러내도록 계획되었다. 오감 정보를 단순화 하는 방법을 일관되게 적용하였다. 빛을 걸러내고, 외부 경관을 걸러내고, 공기를 걸러내고, 소리를 걸러낸 후에 내부 공간을 이루는 재료들을 최대한 걸러냈다. 그렇게 단순화된 오감의 공간은 태초의 터를 떠올리게 하는 듯 했다.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빛을 따라 살길 원했지만
빛은 한편으로는 존재의 노출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위험했다.
반대로 그늘은 어느 정도의 안전을 보장했고 그 안에서 만큼은 빛도 평화로웠다.
그렇게 인간은 태초에 그늘로 이루어진 동굴에 터를 잡았다.
윤형택, 『공간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미메시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