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커뮤니케이션
건축을 하다 보니 클라이언트를 만나 기획설계를 시작하게 되거나, 현상공모, 인허가, 납품, 시공까지 커뮤니케이션의 연속이란 생각을 많이 한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이란 정확히는 제안 또는 문제에 대해 여러 대안을 내어 놓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어떤 안은 선택되고 어떤 건 버려진다. 안을 조금 손 보거나 버리거나 하는 크고 작은 커뮤니케이션이 끝난 후에야 건물은 지어진다. 건물이 지어지면서도 그런 대화는 계속 오간다.
그 시간 속에서 제안이 가진 논리적 타당성(주어진 대지 조건, 법규 그리고 금액 최적의 선택 등)은 필수지만 가끔 최종 안이 채택되는 순간엔 그 이상이 필요하다. 타당성 그 너머의 것. 직관적 판단이 그것이고 또는 안이 가진 감동 또는 가치 말이다.
분명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내 글과 작업들은 분명 예술이 아니다. 한데 타당성 너머의 것 그러니까 직관을 건드리는 것, 감동, 숫자로 표현 불가능한 가치란 예술이 가진 속성 아닌가. 페소아는 예술은 우리가 느끼는 것을 타인에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라 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남에게도 느껴진다면 얼마나 수월한 대화가 오갈 수 있을까? 그뿐 아니라 감동과 가치를 실현시키려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건축물이 지어지는 과정에 큰 힘이 될 거다. 그런 질문 속에서 페소아가 글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쓴 에세이를 만났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일부
페소아는 개인의 느낌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선 왜 보편 느낌으로 전환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편 느낌으로 도달하는지에 대해 썼다. 그는 ‘개인의 느낌은 전달이 어렵다’, ‘누군가에게 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편 느낌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페소아는 자신의 심정을 색조, 전형 그리고 형태에 부합하는 것을 찾으며 보편성을 가지려 했다.
반성
나는 그러한가 질문했다. 내 느낌이란 것이 어떻게 전달될지 고민해 본 적 있나? 하고. 감정과 느낌이란 것이 객관성을 확보한 상태에서 온 것인지, 그리고 이를 글이나 이미지 그리고 도면으로 표현할 때는 보편성을 가지려 노력했는지 하고 물었다.
글을 꾸준히 써야겠다. 매일의 일기로 오늘 있던 시간들을 복기해야겠다. 내 느낌과 감정은 어땠는지, 함께한 이의 시간은 어땠을지 가늠해 봐야겠다. 이슬아 작가 글에서 처럼 주어를 바꿔가며 글을 써야겠다. 나는에서 너는, 엄마는, 아빠는, 할머니는, 형은, 누나는, 몸이 아픈 내 친구는, 소는, 돼지는, 닭은, 박쥐는, 이제는 죽고 없는 그는, 어제의 너는으로. 그리곤 몇몇 글감은 보편성을 가져 이곳에 적어 둬야겠다. 어차피 많은 이들이 보는 곳도 아니니, 쿰펠에게, 송에게 내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 잘 전달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겠다.
건축과 글과 예술은 설득력, 전달력, 보편성, 객관성 등으로 연결된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다면 더 나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