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b > 우자이/삶과 생각

아름다움은 고통을 품고 있어야 한다 - 강상중 『구원의 미술관』읽기

  아름다움은 고통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아름다움은 관람자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고통은 작가, 작품, 관람자에 서린다. 작가 본인이 겪은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앞에 초연히 섰을 때 작품은 아름다워진다. 작품 자체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고통을 표현하고, 설득력을 가질 때 아름답다. 관람자가 살아오면 겪은 고통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경우도 그렇다.

 

  어느 날, 대림미술관에서 사진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토드 셀비의 ‘즐거운 나의 집’ 전시를 봤다. 셀비는 연예인, 디자이너, 음악가, 작가 등의 집이나 작업실을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찍은 사진을 늘어 놓았다. 다양한 색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그의 일러스트도 멋졌다. 그러나 ‘멋지다’, ‘개성적이다’, ‘예쁘다’ 등의 감탄만 나왔다. 한 디자이너의 오리 모양 주전자가 가지고 싶거나, 혹은 나도 저런 삶을 살 수 있으면 하는 부러움뿐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고통은 없었다. 인물-공간 사이 관계에 새로운 이해의 순간이라거나 혹은 삶에 대한 고민의 시간도 보낼 수 없었다.

토드 셀비 '즐거운 나의 집' 전시

  반면 강상중 작가의 <구원의 미술관>에서 소개한 작품은 달랐다. 제목 그대로, 작가는 그에게 구원이 된 작품을 소개하고 감상을 나열했다. ‘자이니치’인 자신의 고통과 동일본 대지진의 고통을 품고, 작가는 여러 작품을 만났다. 그림 앞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 되물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대응하는 방법도 배웠다. 작가뿐 아니라 나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을 한동안 뚫어지게 보기도 했다. 확실히 결연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걱정과 슬픔에 찬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얼굴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밀고 나아가는 사람의 고통이 보였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했다. “뒤러도 두려움 끝에 자기 선언을 했구나.”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그림이 아닌 옛 건축물에서도 고통을 품은 아름다움을 느낀 적 있다. ‘회현 제2 시범아파트’는 남산 3호 터널 옆에 서 있다. 윤수일의 노래 ‘아파트’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으로, 한때 연예인들이 사는 잘 나가는 아파트였다. 지금은 건축물 안전등급은 D등급으로 철거는 면했지만, 리모델링을 기다리고 있다. 또 남산 자락에 있는 바람에, 버스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 15~20분 동안 올라야 한다. 한여름이면 땀으로 옷이 살에 척척 붙는다. 그런 부족한 인프라 탓에 총 세대 353세대 중 250세대는 빈집이다. 그런 어려움에도 사는 사람이 있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 다니면 살짝 열어놓은 문으로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가고, 밥 짓는 냄새가 난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아파트를 가꾼다. 식물을 기르고, 복도를 잘 닦아 놓는다. 고통과 강인함이 함께 있는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힘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아름다움의 범주는 다양하다. 앞에서 말한 토드 셀비의 대림 미술관 전시작품도 아름답다. 그러나 단지 ‘좋다’는 감정은 ‘좋다’에서 끝이 난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관이 더 넓어지는 일은 없다. 그저 내가 옳았음을 확인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생길 뿐이다. 이에 비해 고통을 수반한 부정적 감정은 “왜 이렇게 아프지?”, “내 생각 중에 무엇이 잘못되었지?” 하는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강상중 『구원의 미술관』 사계절, 2016